삼국의 전쟁: 삼국의 정세변동과 광개토대왕릉비의 진실?
4세기의 국제 정세
*5호 16국시대(4세기 초 서진 쇠퇴~439년 북위 중국 재통일): 서진이 정치적 혼란으로 세력이 약해지고, 주변 여러 민족이 북중국을 번갈아 침입해 새 왕조를 세움, 선비족 모용외 세력 확대하여 전연이라는 나라를 건국함. 후조와 대립 중.
*중국vs고구려
*미천왕(15대): 요동으로 가는 길목 서안평을 점령, 전연과 대립.
을불(고추가 돌고의 아들), 사촌형 봉상왕의 폭정으로 소금장수하다가 왕이 됨 5호 16국기 한반도에서 중국의 군현세력을 몰아냄(대동강 차지)
*고국원왕: 342년 고구려와 전연(모용황) 요동 지역 놓고 공방전 벌임(후조와 협력, 고구려 대패, 고국원왕 어머니 포함 5만 명 포로, 미천왕 시신 가져감), 수도 평양으로 옮김
*백제vs고구려
*책계왕(286~298)은 대방태수 딸과 결혼한 사이->낙랑 전쟁 당시 전사
*분서왕(298~304) 낙랑 자객에게 전사, 낙랑과 대방이 멸망하자 백제가 흡수
*369년 3월 고국원왕 vs 백제 근구수(375~384)고구려와 백제의 첫 전쟁: 백제가 지형을 이용하여 승리함, 5천여 명 전사
*2차전에서 근구수왕 고국원왕을 전사시킴(사기라는 고구려인의 도움을 받음)
*근초고왕: 대북으로 대동강 유역, 남으로는 마한의 땅을 전부 통합함(진동태수, 영낙랑태수 호칭)
- 외교: 중국 동진과 국교, 일본에 아직기를 보내 한자를 가르침, 왕인 천자문과 논어 가르침,
- 칠지도를 만들어 일본왕에게 내어줌
- 고흥에게 백제의 국사 <서기> 쓰게 함
요서경략설의 허구성: 송서와 양서에 나와있지만, 모두 남조에 속하는 나라 북조에는 없음
2. 5세기 고구려의 확장
*광개토대왕릉비(중국 지안):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인 장수왕이 세운 지석으로 높이가 6.93m, 1880년 발견
• 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助貢 而倭以辛卯年來渡海 破百殘OOO羅以爲臣民
• 정인보: 주어를 왜(倭)로 보지 않고 고구려로 봄
백잔(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고 그래서 조공을 해왔다. 신묘년에 왜가오니 (고구려가) 바다를 건너가서 <왜>를 파했다. 그런데 백제가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 침략하여 그의 신민으로 삼았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 호태왕, 영락(永樂)대왕, 광개토대왕
- 첫째 부분 : 제1면 1행 ~ 6행-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
- 둘째 부분 : 제1면 7행 ~ 3면 8행-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
- 셋째 부분 : 제3면 8행 ~ 4면 9행-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
*광개토대왕(19대): 거란족 비려 정벌, 연해주 숙신, 동부여 점령, 백제, 후연 동북아시아 국가와 승리 신라 내물왕 도움
396년 백제 58성 700촌 공략 한성 아신왕 항복 받아냄
- 400년: 신라 출병, 내물마립간은 경쟁자인 이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냄, 이실성은 401년에 귀국하여 내물 마립간에 이어 왕위에 오르려 했으나,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눌지 마립간이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름(눌지-자비-소지왕으로 부자 왕위 계승)
호우명그릇: 광개토대왕비와 똑같은 서체로 광개토대왕 장례 1개월 후 415년 신라 사신이 받아온 것으로 추측
402년: 후연이 고구려가 남하한 틈을 타 공격하자 요충지 요서 숙군성 함락
404년: 백제가 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물리침. 후연이 요동성을 공격하자, 함락시키지 못함
407년: 후연 풍발이 쿠테타 모용 왕실 내쫓음, 고구려 후예인 고운이 북연 건국
410년: 동부여 토벌 64개성, 1400촌을 얻음
중원에서는 북위가 등장, 이후 고구려 완전 요동 차지
*임나일본부
-일본의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부터 6세기 중엽까지 약 200년간 백제와 신라, 가야를 지배했다는 것.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직접 지배했다는 것
*장수왕: 말 그대로 장수한 왕(98세), 413년 즉위, 재위기간 79년(413~491)
- 북아시아 유목 민족 유연과 관계를 가짐
- 평양 천도 후 신라와 백제와 항쟁 승려 도림을 이용해 백제 국력을 피폐하게 함(한성 함락, 북위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 공격을 제안하는 개로왕 살해(승려 도림 백제 밀파설) 문주왕 사비로 천도) 신라의 왕위계승에 관여)
- 남북조시대 중국 대륙의 분열과 대립을 적극 이용하는 외교 전략 펼침
1) 435년, 438년 북연, 북위, 송과 갈등, 북위에 쫓긴 북연의 왕 받아들임(풍홍) 풍홍이 거만하게 굴자 시종을 빼앗고 아들을 볼모로 삼음. 송나라로 망명해버리자 장수를 보내 살해(고구려의 위상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줌)
479년 유연과 손잡고 지두우 분할 점령을 꾀함
2) 신라 남진: 468년 신라 실직 공격, 481년 신라 북쪽 변경(포항 풍해)
남제: 북위에서 사신의 관저를 두었는데, 남제의 관저가 제일 크고 고려의 관저가 그 다음이었다.
- 문자명왕(491~519)
- 안장왕(519~531)(백제에 몰래 가서, 사랑하는 한주를 얻기 위해 안학 공주를 흠모하는 을밀에게 용사 5천을 주고 계백현으로 가서 승리함조선상고사)
- 평원왕(559~590)(평강공주를 바보온달에게 시집 보냄? 온달은 후주 무제를 물리침)
- 양원왕(545~559)(신라와 전투 중 사망 한강변? 온달산성?(단양))
3. 6세기 백제의 부흥과 신라의 비약
*나제동맹
최초 : 최초 나제동맹이 형성된 것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이 소멸된 뒤 삼국이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
1차: 내물왕(奈勿王, 356∼402)이 즉위해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게 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화 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366년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은 신라의 내물왕에게 사신을 파견 동맹 내물왕 말기 파기
어린 아들 실성(광개토대왕 옹립) 아들(미사흔)을 왜에, 동생(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냄. 5촌 당숙 눌지 군권 장악, 미사흔은 왜를 탈주, 고구려는 눌지를 왕위에 오르게 함 고구려가 후연과 전쟁하는 틈을 타서 백제와 화친, 하슬라 성주가 고구려 장수를 죽이자 군사를 보냄 사과했으나 계속해서 공격함
2차: 433년 백제의 비유왕(毗有王, 427∼455)과 신라의 눌지왕(訥祗王, 417∼458) 사이에 맺어진 것이 제2차 나제동맹. 이 동맹은 필요할 때 상호 원군을 파견하도록 한 군사적 공수동맹
눌지는 42년간 왕위를 지키고 458년 죽음(고구려의 영향으로 벗어나게 함) 진흥왕 배반할 때까지 120년간 지속
※ 백제의 부흥
*동성왕(479∼501)
조카인 삼근왕(문주왕 이후 왕)을 죽일 가능성?
- 남진에 대처하면서 신라와 공조관계(493년(동성왕 15) 신라와의 관계를 보다 돈독히 하기 위해 신라의 왕녀를 맞이하는 혼인동맹)
498년 탐라가 공납을 바치지 않자 무진주(광주)까지 내려가 압박함
백가의 난으로 인하여 살해 당함
*무령왕(재위 501~523)의 통치체제 정비
동성왕의 둘째 아들? 이복 형?
22담로(22개 거점)설치(성왕 때 확대), 왕족파견, 지방통제 왕권강화
중국 남조 양(梁)나라, 일본과 활발한 교류(국제 교류 다시 시작) “이제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퇴해 다시 강국이 되었다.”
한강 유역 회복을 위한 공격 감행, 대가야 제압
*성왕(백제 중흥의 진정한 주인공), 사비(부여) 천도
-사비시기에 담로제를 방-군-성체제(전국 5방, 방령 파견(700~1,200명 통솔, 방 아래 6~10개군)
-성왕 때는 백제가 다시 신라와 연합하여(나제동맹) 고구려에 맞섬
-불교진흥, 남부여로 국호 개칭, 중국 남조 교류,
-16관등제 22부 관청을 두고 지방에는 5부·5방을 설치
-550년 1월 고구려 도살성 함락, 3월 고구려 반격하여 백제 금현성 함락 이에 신라 이사부가 두 성 모두 점령, 고구려 다시 금현성 공격
-551년 한산성(漢山城) 부근을 탈환, 초기 한강 하류 6군 차지, 신라는 상류 10군 확보(당시 고구려는 북방 돌궐 침입 받은 상황, 내분)
-553년에 같은 지역 신라에 뺏김(진흥왕이 고구려와 협상?) 553년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 보냄. 다음해 창(위덕왕)을 내세워 554년 관산성(옥천) 전투
백제+왜+대가야 vs 신라: 초기는 연합군 승리
이후 신주(서울)을 지키는 김무력(금관가야 셋째 왕자, 김서현(만명과 결혼 만명은 법흥왕 동생이자 진흥왕 아버지인 입종 갈문왕 손녀) -김유신 가야 무장계) 부대가 주도하여 성왕을 죽임. 대가야는 백제와 동맹했다는 이유로 침략당함
-이후 위덕왕은 충격으로 출가하려고 했으나, 남북조와 외교관계를 맺으며 국제적 위상을 맺음(북제, 북주, 수 등과 축하사절), 신라를 공격하기도 함
*무왕(30대)(서동): 서기 600년에 왕위에 오름
-당나라와 친선, 왜국과의 친교
–신라 아막성으로 쳐들어감(12차례나 신라를 쳐들어감)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했다는 설은 현재 논란에 있음(의자왕 출생 당시 진평왕은 30세라 진평왕 셋째 딸이 의자왕을 낳을 수 없음)
-사탁왕후(한미한 가문의 딸일 가능성): 무왕의 건강을 기원, 의자왕에 대한 것은 없음
※ 신라의 비약
*소지왕 때 우역 설치, 월성 대규모 정비, 왕경에 시장 만듬
*지증왕(재위 500~524): 마립간 시대의 종결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함, 왕호마립간→ 왕-신라 :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
-주군제 설치, 순장 금지, 우경 장려, 농업생산력 높임
-이사부우산국 정복, 병부령오름, 경시서 설치
*법흥왕(524~540): 영토를 넓히고 중앙집권국가로 제도적 틀을 갖추기 시작한 시기
-율령 반포, 백관 공복 제정, 불교 공인
-병권을 통괄, 귀족 대표인 상대등 설치
-금관가야 병합, 영토 확장
*진흥왕(540~567): 법흥왕의 조카, 태후 섭정
-거칠부 국사(國史) 편찬, 왕실의 권위를 높임
-독자적 연호 개국(開國) 사용
-고구려, 백제를 공격 한강 유역 하류까지 차지, 나제동맹 결렬
-대가야 복속, 낙동강 일대 장악(김무력 활약)
-강원도,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
-새로 정복한 지역 순수비(巡狩碑) 세움(황초령, 마운령, 북한산) 단양적성비는 단양 점령 과정 신라 협조 현지인과 후손을 배려한 내용
-창녕비는 군 지휘관과 귀족 관료가 대내외 정책을 천명한 내용
-둘째 아들 진지왕이 왕으로 등극
4. 7세기 고구려 수·당 전쟁
*수나라의 통일
-북주(동위)가 북제(서위)를 멸망시키고 북중국을 통합하고 581년 수나라로 국호를 바꿈
-589년 돌궐을 분열시키고, 남쪽의 진을 멸망시키면서 남북조시대를 끝냄(돌궐(북), 서역, 남(베트남) 토욕혼, 고창 차례로 정복하면서 북방과 서역일대 장악) 동쪽 고구려만 남음
-고구려 또한 국경지대를 정탐하고 거란·말갈족 등과 더불어 공격-중국으로부터의 망명자를 받아들이며 은밀히 돌궐과의 연결
*고구려-수 전쟁
-영양왕: 말갈군 이끌고 요서 선제 공격, 598년(영양왕9) 수륙 양로를 통한 수나라의 반격
-598년(1차): 장마기(6~9월)에 쳐들어와 싸우지도 못하고 돌아감
- 599년 동돌궐 수에 항복, 603년 서돌궐 궤멸, 고구려 한강 유역 수복
- 605년 수나라 베트남 지역 임읍, 요서 거란 정복
- 607년 영양왕은 동돌궐의 지도자 계민가한에게 사신을 보냈는데, 마침 수양제가 방문중
- 609년 토욕혼 정벌, 610년 고구려 침공 준비, 611년 국지전, 수나라가 백제와 신라를 끌어들여 고구려와 전쟁하려 했지만, 실패
- 612년(2차): 수나라(양제, 아버지 폐위시킴)는 두 번째의 고구려침공(동원된 병력은 모두 113만여 명)
- 매일 1군씩 각 군대 거리 40리, 1달에 걸쳐 요하 돌파
- 4월 27일 수양제는 돌아가버리고 요동성은 장군들에게 맡김(요동성은 1만 명 정규군 주둔)
- 수양제에게 허락을 맡아야 항복을 받아들이는 시스템을 인지하고 일부러 항복 요청을 계속함, 이에 다시 6월 11일 수양제 복귀
- 우중문, 우문술 30만 5천명 별동대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 직접 공격
- 수군 내호아 단독 공격
- 고구려는 평양에서 나와 반격(고건무(영양왕 이복동생), 첫 싸움 수나라 대승,
- 우중문과 합류하지 않고 바로 평양성 공격 성으로 끌어들여 격파
- 고건무는 영류왕(618~642)으로 등극(온건파) 평양 기반 귀족 약화, 조정
승승장구(7전 7승) But 군량 부족으로 후퇴하다가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에 의해 패배, 수양제는 피살당함, 남은 병사는 2,700명
- 3차: 30만 대군으로 요동성 공격(비루동(망루 전차), 운제(구름 사다리) 동원, 함락못하고 퇴각 내부 반란)
-614년(4차): 내부 반란 진압 후 공격하였으나 실패
-618년: 농민반란 이후 수나라 멸망
*당나라의 통일
-628년 당나라 중국 재통일->돌궐 분열(동,서)->동돌궐정벌 635년 토욕혼(선비족이 세움),
-640년 고창(한인 지배 토착민 투르크계)정벌
-669년 서역의 토번(吐藩, 티베트)과 당 사이에 군사 충돌이 일어나 서역 정세의 변화에 따라 나당전쟁은 격렬해지거나 소강상태를 보였음
-747년 고선지의 서역원정으로 소발률국 정벌, 서역 20개, 서방72개국 조공을 바침). 750년 석국(타슈켄트) 정벌, 741년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 755년 안녹산의 난(소그드인+돌궐)(양귀비의 양자)
*고-당전쟁(644~668)
643년: 고구와 백제 신라 당항성 협곡하고 대당 교통로 봉쇄
- 영류왕: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음, 연개소문의 반란으로 살해
- 645년 당나라 이를 구실로 645년 1월 길을 나누어 공격(현토, 개모성 함락 5월 요동성 함락(포차 활약, 충차로 불붙임, 성벽을 기어올라가 12일 접전 끝에 함락)(요동성 공격만 고집한 수 양제의 실패를 거울 삼아 주도면밀하게 준비)
- 백암성 점령 이후 진격을 못함, 신성, 건안성 전투에서 발목을 잡힘)
- 안시성으로 돌려 고구려군을 유인하여 1만 명 돌궐 기병 공격
- 3만 명 고구려 병사 죽고, 말갈족 3,300명 생매장
안시성 전투: 산성이기 때문에 포차 효율성 떨어져 토성을 쌓았으나 고구려군이 무너뜨림
*백제의 멸망
-의자왕(31대): 641년 등극 백제의 마지막 왕, 친고구려정책을 펼침, 해동증자라고 불리움(성품과 효심) 신라를 공격
신라는 647년 비담의 난, 10일만에 진압 이후 신귀족 세력 시대(김춘추는 일본과 당 태종에게 나당연합 제안, 648년 대동강 경계로 분할 점령하기로 밀약)
신라 40개 성을 빼앗고, 대야성(경상남도 합천, 백제, 신라의 경계)을 공격함(대야성 내분) 첩자 검일이 백제를 도움(대야성 성주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김)
대야성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과 딸을 죽임
-but 사치와 방탕에 빠지기 시작함(성충 간언 무시), 태자 융을 폐위하고, 은고의 아들을 왕자로 삼음, 민심 파탄나기 시작함
“만약 침략을 당하면 육로는 탄현(완주군 운주면)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금강 하구)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성충)
*매소성전투(675): 당 육군 20만 명을 대파
*기벌포전투(676): 서해안 금강 하류 기벌포(개펄이 펼쳐 있어 상륙이 힘듬)에서 격파
*백강전투(왜군+백제군연합->패배) 당나라는 먼저 도착해서 지형을 확인함
나당연합군이 백제 기병을 격퇴함
*청야전술: 중간 기항지를 방화한 신라의 작전으로 일본 보급품을 채울 수 없었음
*고구려 부흥운동:고연무(신라 연합), 검모잠(한성에서 보장왕 아들 안승왕으로), 안승,검모잠 죽이고 보덕국왕으로 칭함
*백제 부흥운동 복신,도침(주류성에서 왕자 부여 풍 왕으로 추대)
*대동강에서 원산만 이남을 영토로 확보(676년)
-660년 3월 소정방 당 13만 대군, 6월 신라 김유신 5만 대군 전투, 황산벌(논산) 전투 7월 의자왕 항복(멸망)
백제 땅에는 기미지배(군대 주둔, 당에 협조하는 현지인을 지방 장관으로 임명)
-백제부흥군(복신, 도침, 흑치상지 임존성 거점 세력 형성 부여 풍을 왕 옹립), 왜국과의 연계
-663년 백강전투에서 백제부흥군과 왜 연합군 대패, 내부 분열(복신이 도침 제거, 부여 풍이 복신 제거)
*고구려의 멸망
- 642년 김춘추의 지원 요청 거절 “죽령은 본래 우리의 땅이니 너희가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줄 수 있다.”
661년 여름 고구려 공격에 착수, 남생 고구려군 압록강에서 대패, 평양성에서 주둔하는 연개소문의 공격, 당나라는 보급 문제로 실패하고 662년 1월 퇴각
삼국사기: 방효태가 사수가에서 연개소문과 싸워 전군이 죽고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665년 연개소문 사망, 맏아들 남생 당에 투항, 남건 항쟁, 정토(남쪽 신라 국경 담당) 신라 투항
667년 요하 강을 건너고 신성 공격(667년 2월~9월 버팀) 9월 신라와 함께 함락, 설하수 전투 대패, 압록강 대행성 함락, 청천강, 668년 8월 평양성 전투(보장왕과 연남산 배신), 9월 함락
668년 9월 멸망(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 설치)
- 671년 문무왕이 당의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에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 토지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겠다.”-> 불완전한 통일 vs 백제통합론(불완전한 통일)
*나당전쟁
- 668년 고구려 멸망, 670년 3월 검모잠 신라에 구원 요청
- 670년: 고구려 부흥군과 합세하여 말갈 기병(당나라 전초부대) 격파
당시 669년 토번이 당나라를 공격하자, 70년 설인귀 주요 병력이 투입됨(청해), 10만 전멸
671년 7월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소부리 주를 설치(백제 고토 확보)
신라가 당나라 군량운반선 70척 격파
- 672년: 토번과 당나라 화친하자, 다시 고건이 이끄는 당나라가 신라 중앙군, 고구려 유민 전멸(안승, 검모잠 분열 고구려 부흥운동 진압) 8월 석문전투(신라군 전멸)
설인귀 항의(설인귀답서)
673년 9월 임진강 유역 나-당 격전, 674년 당나라 김인문(문무왕 친동생) 국왕 임명
675년 2월 칠중성 전투 당나라 장군 유인궤 승리
675년 매소성(연천) 보급 차단, 북한산성 신라부대가 보급이 차단된 당나라 군대 공격, 승리말무덤, (신라 장창군) 고관과 이근행은 평양으로 갔다가 본국으로 돌아감(김원술 참전)
676년 11월 기벌포(금강 하구) 전투: 1번 패배 22번 승리(당나라 2천 명 섬멸)
티베트가 당나라와 접함, 기벌포 전투 이후 한반도 병력 후퇴 명령 내림(웅진도독부 소멸)
*당시 신라는 장창군(2인 1조, 창 길이가 2~3m)으로 기병 견제, 가까이 오면 신라 쇠뇌 사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