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FMZJY7PKRR 조선의 르네상스: 17~18세기 문화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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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르네상스: 17~18세기 문화의 재발견

muto1149 2025. 5. 2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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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조와 정조

 

1) 영조의 왕권 강화와 업적

-경종: 소론과 남인 권력 장악, 노론 4대신 죽임(신임사화)

-세제책봉후 연잉군 수렴청정(소론 반대), 신임사화 이후 축출된 노론파 기용

-이인좌의 난발생(이인좌는 소론과 남인을 규합, 경종 독살설 주장) 청주성 함락

-밀풍군 이탄을 왕위에 오르게 하려다가 진압되어 능지처참, 밀풍군은 자결

-균역법(1필로 줄임, 선무군관포), 탕평책(각 파를 고루 등용) 본격 실시

-군영 정비: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 세 군영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이후에 동대문 훈련도감 군인들에게 장사할 수 있는 권한을 줌(동별영, 동대문시장의 기원))

-청계천 준설: 태종이 청계천을 준설한지 약 300여 년 동안 방치된 청계천을 준설, 제방과 석축등을 보수하여 수도 서울을 정비함

 

2) 사도세자

-잠잠하던 당쟁의 불길이 사도세자가 섭정을 맡으며 재차 타오름

-소론 및 남인, 북인 세력(사도세자) vs 노론파->위기

-사도세자 평양으로 간 사실을 숨기자 노론이 이를 고하고 화가 난 영조는 사도세자를 따르던 3정승(이천보, 이후, 민백상)을 모두 자결하게 함

-이후 뒤주에 가둔 후 뚜껑에 못을 박아버림(8일 후 사망)

-사도세자 정신병론vs당쟁희생론

 

3) 정조의 탕평책

-정치 운영 중심을 비변사의정부로 옮기려 함

-강화된 왕권을 중심으로 정치 운영을 하며 기존의 각 정치세력의 균형을 이루고자 함

-그러나 탕평책은 기존 정치 세력의 참여 기반을 좁히고,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 운영은 새로운 정치논리를 제시하지 못함.

-정치는 차츰 보수화되고, 관료, 외척 가문들이 정치세력으로 팽창됨

 

4) 정조의 권력 강화와 업적

-정조 즉위 후 노론파들은 시파와 벽파로 나뉨

-벽파: 사도세자 비방, 주로 노론 계열들, 정조 고모 화완옹주(양자 정후겸), 정조의 외척(홍인한)

-시파: 사도세자의 죽음을 과도하다 생각한 무리들(남인 계열)

-<시전> 사건 요아편을 영조가 읽지 말라고 했는데, 읽다가 걸렸으나 홍국영의 기지로 살게 됨-> 정조 즉위 후 정후겸 사약, 화완옹주 귀양

-정조시해미수사건(평양감사 홍지해(홍계희 아들) 사주) -> 노론 척결 정유역변

-홍국영 북한산성 찰리사, 도승지, 수어사, 금위대장 무소불위 권력

-수원 화성 축조 : 최신 서양식 공법을 이용, 신도시를 건설하고자 노력함, 화성 행차를 통해 격쟁과 상언이라는 제도로 民人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통치에 활용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됨

-신해통공 시행 : 국역을 많이 부담하는 육의전(선전(중국 비단), 면포전(국내 면포), 면주전(명주실), 지전(종이), 저포전(모시), 내외어물전(건어물))을 제외한 시전이 소유하고 있던 금난전권 폐지(두 차례 전쟁 이후 청나라에 바칠 조공 물품 조달의 독점권)

-체제공:독점 상인의 매점 매석을 엄금하는 조치도 포함되어 있음

-사상 중심의 상품 유통이 발달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줌(조선후기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 촉진),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막고 싼 값에 매입, 거부 시 빼앗아 감, 압수까지 함

-규장각 설치 : 학술과 정책 연구 기능을 강화, 인재를 발탁,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관원 가운데 능력 있는 사람들이 많이 기용됨(초계문신제실시)

-장용영 설치 : 병조 밑에 두어서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일원화하여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춤(장용 내영, 외영)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

 

2. 실학

 

1) 성리학에 대한 비판 등장(양명학, 북학, 서학)

-성리학 : 조선후기의 가장 지배적인 사상 그러나, 사회변화를 포괄 또는 사회 내부의 이해관계 조정 못해서 이탈

-양명학 등장했으나, 영향을 크게 미치지는 못했음

-남인은 서학, 노론 학자들 일부는 북학 중시

-그 외: 허목(원시 유학), 윤휴와 박세당(주자의 해석을 부정),

서인 중에서는 노론 일부 북학, 소론 양명학, 남인 일부는 서학ㆍ성호학파: 유형원 학문 계승, 경세치용(經世致用)

-이익 :성호사설, 곽우록사회 현실의 각 부분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

후예들(안정복 계열 우파, 서학 중심의 좌파

-이들을 경학, 지리학, 사학, 천문지리학, 음운학 등 다양한 영역 심화

 

2) 농업과 토지제도 개혁론

-유형원(반계수록) : 농민들로 하여금 토지를 균등하게 점유하도록 하자는 균전제 주장

-이익(곽우록) : 토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해 겸병을 방지하자는 한전론

-정약용: ()를 기본단위로 농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경작하여 수확물을 공동분배하자는일종의 공동농장 형태의 여전제를 제창하였고, 뒤에는 점진적인 개혁안으로서 자영농경영을 기본으로 하는 정전제를 주장

-북학파: 노론의 일각에서 새로운 학풍으로서 북학파 형성, 이용후생

-홍대용(의산문답), 박지원(열하일기),박제가(북학의), 유득공, 이덕무

-청의 서울인 연경에 다녀옴,청 문화의 우수성을 보고 느껴 조선 현실을 개혁하려면 청의 문화를 먼저 배우자고 함(화이론적 명분론에서 탈피)

-노동하지 않는 양반 유학자를 비판, 상공업을 높이 평가, 고정관념을 비판

 

3) 그림과 편찬사업

 

*왕조중흥기, 문예부흥기라고 일컫음

- 법전류: 속대전, 대전통편

- 전서류: 동국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

- 지도류: 여지도서,해동지도

- 서적류 : 탁지지(호조),춘관통고(예조)

- 기타류: 일성록(정조 일기),비변사등록

무예도보통지(군사훈련),동문휘고(청과의 외교관계 문서들을 수집, 정리)

 

4) 정약용

-정약용 :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임 거중기 만듬, 서양의 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해 이용감(利用監)이라는 기구를 두자고 주장

-강진 등지에서 유배생활, 농촌사회의 현실을 직접 지켜봄,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등 많은 저서를 남김

-서학으로 경도된 좌파는 천주교에 경도되어 서학에 열중함(성리학과 거리 둠)

-서양 과학기술의 영향으로 세계관의 변화 보임, 중국 중심의 세계 인식에서 세계적 차원으로 과학적 안목이 바뀌어 감

 

5) 서구세계와의 만남

-숙종 34년 관상감 : 아담 샬의적도남북총성도(赤道南北總星圖)를 모사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학설이 제기됨, 서양이 역학, 천문학 등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함

-서양의 역법을 익혀 시헌력을 채택

-재조명: 지구구형론, 지구회전설 제시

-지리학 : 마테오리치의곤여만국전도, 베르비스트의곤여전도등 근대적 지도 수용 세계관이 확대됨

-수학 : 유클리드기하학의 기하원본전래됨, 기하학과 대수학 등 서양의 수학에 관심 가짐

 

6) 천주교와 다양한 민간신앙

-서양의 과학기술과 함께 천주교가 수용, 한역 천주교서가 조선에 옴

-지식인들은 문화적 호기심에서 서학서를 읽음

-천주교는 사학, 사교로 규정되고 배격됨, 제사를 모시지 않아 문제가 됨

-천주교는 정조 때에 심하게 탄압받지 않았으나, 순조가 즉위하면서 박해가 대대적으로 시작

다양한 민간신앙

-민간신앙:주자학을 부정하고, 조선왕조가 망하고 정씨가 들어선다는 정감록

*도참 : 왕조를 부정하는 가장 중심적인 사상, 홍경래의 난도 도참을 활용

-미륵신앙: 미륵이 세상을 구제한다는 신앙에 바탕

이러한 사상들은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민중의 바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민중 사이에 널리 퍼짐, 민중에게 널리 퍼진 이 민간신앙들은 새 세상이 반드시 온다는 신념을 불어넣어 민중의 저항의식

*1801년 신유박해, 황사영백서 사건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貞純大妃)는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근절하라는 금압령

-한역 천주교서가 조선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

-이승훈·이가환·정약용 등의 천주교도와 진보적 사상가가 처형 또는 유배되고, 주문모를 비롯한 교도 약 100명이 처형되고 약 400명이 유배

-황사영백서 발각

내용: 천주교 박해상, 주문모 죽음,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켜 감독,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서양 배 수백 척을 보낼 것을 요청

-벽파와 시파가 싸우던 형국: 정순대비는 경주 김씨로 6촌 오빠 김관주에게 정권 줌

-시파의 남인이 천주교를 믿고 있다는 것을 구실로 천주교 탄압 시작

-시파 김조순의 딸을 순조의 왕비로 맞아들임-> 세도정치의 시작

19세기, 순조대, 김조순이 권력을 장악, 그의 집안인 안동 김씨가 정치권력 장악

 

3. 세도정치

 

1) 세도정치 시작

-역대 왕들과 척족관계에 있는 양반관료가 실제 정치권력을 장악, 세도정치

-순조 말년~헌종 풍양 조씨에 의한 세도정치

-철종 즉위, 다시 안동 김씨가 권력 장악

-왕권은 명목에 불과, 조정의 요직은 권문일족들의 사유물이 됨

 

*17~18세기 당쟁의 결과물, 정치기반이 축소, 노론, 그 가운데서도 외척가문에 권력이 집중됨, 권력은 비변사에 집중됨

-의정부 : 의례 정도만을 담당, 육조 : 비변사에서 결정된 사안을 집행

-외척들은 비변사를 장악하여 권력을 행사, 호조, 선혜청 등의 요직 차지, 재정기반을 굳힘

-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영도 장기적으로 독점 정권 유지의 토대

 

2) 효명세자와 그 후

-순조는 풍양조씨 조만영을 끌어들임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시작

-효명세자는 조선 제23대 국왕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맏아들(1809년생)

-조만영의 딸과 결혼(이후 조대비)

-비변사 장악, 인재 등용, 과거제도 개혁 장악원 재건

-신헌, 박규수와 함께 개혁을 논의

-문무예악 어느하나빠짐없이 뛰어남

-효명세자(익종)의 아들 헌종(1834~1849) 즉위

-8세에 즉위하여 순원왕후가 권력(안동 김씨)->천주교 탄압 기해박해(1839)

-신정왕후 조대비섭정(풍양 조씨)

-철종의 즉위

-헌종 주위 6촌 이내 친척이 아무도 없었음(치열한 당파 싸움의 결과)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이 강화도에 있었고,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전계대원군의 아들(유일하게 살아남음)이 왕위에 등극(철종)

-헌종의 7촌 아저씨뻘로 사실상 정통성이 없음

 

4. 세도정치 후 사회

 

1) 지방지배질서의 변화

-19세기, 지방 사족의 영향력과 주도권이 약화됨-주민들이 장시나 두레 등을 통해 생산 자립성을 높여 나가면서 마을 운영에서도 자신들의 의견을 내세우게 됨, 사족들의 마을 지배력이 약화된 것

-신향(新鄕):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바탕으로 새롭게 성장하던 부민층 가운데 일부가 수령과 결탁하여 신향(新鄕)으로 성장

-기존 사족에 대항, 세도정권과 연결, 구향압박

-고을 지배층이 구향과신향으로 다툼(鄕戰)

-향회의 주도권이 수령에게로 넘어가는 경우도 있음

 

2) 조선후기 농업의 발전

-논농사: 수리시설이 확충됨, 이모작 가능해짐, 이앙법이 전국으로 확산(부농)

-밭농사: 그루갈이(한 해에 두 번 농사짓는 일), 견종법(고랑에 파종하는 방법)

*견종법: 이랑이 바람을 막아주고 습기를 머금기 때문에 작물이 추위와 가뭄도 견딜 수 있게 해 주어 수확량이 많아짐, 북쪽 지방에서도 보리를 재배

*면포(진주), 모시(한산, 임천, 남포), 삼베(함경도 육진 지역), 명주(성주) 특산품

*지주제의 확대로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몰락소작농 또는 임노동자층으로 전락

-공법시행한지 얼마 되지 않아 연분 자체를 하등으로 고정(하하년혹은 하중년)

-인조대 영정법(하등 고정 현상 법제화) 1결 경작지 전세 쌀 4, 밭에서는 콩

-숙종 후반대 비총제(이전해와 비교, 전세를 내지 않는 경작지 정함)

-광해군대 선혜법(대동법 최초) 경기도 실시, 인조반정 직후 호남 호서, 강원도 대동법(大同法): 각 지역 토산물 쌀로 바침(토지 결수) 공인

 

3) 수공업 발달

-공인(貢人): 관청 수공업은 쇠퇴, 관청에서필요한 물건은 공인(貢人)을 통해 구입

-점촌(店村): 수공업 물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남 생산도 촉진되어 전문수공업자들이 모여서 물품 만드는 마을(점촌)이 생겨남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성장 : 부를 가진 사람들이 작업장을 차려 사람을 고용, 물건을 직접 생산(19세기 중엽, 정주 납청-50개의 크고 작은놋그릇 작업장, 분업과 협업)

 

4) 광업 발달

-동광과 은광의 개발: 전국의 장시에서 동전이 널리 유통, 청ㆍ일본과의 무역에서는 은이 결제수단으로 통용, 구리와 은의 수요 크게 늘어남

-관영 광업은 쇠퇴, 사적으로 채굴하는 잠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세금을 내고 광산을 개발

-광산에서는 자본(물주)과 경영(덕대)이 분리수백명이넘는 많은 인원(광군)을 동원하여 분업과 협업으로 채굴 작업

-이러한 자본-임노동의관계는 18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시작

 

5) 장시와 상업도시

-농산물로 수공업 제품 교환(5일장)

-18세기, 전국에 1000곳이 넘는 장시

-원산, 강경, 마산 등 상업도시가 형성

-장시는 유통의 중심지

-경강상인: 서울 소비 쌀 조달

-공가(貢價)로 주어진 쌀, , 돈이 시장 유통

-개성상인(송상) : 인삼을 재배, 판매, 의주상인(만상)과 동래상인(내상)들은 각각 청, 일본과의 무역

*대동법도 시장의 발달에 일조함

 

6) 삼정의 문란

-삼정: 기본적인 세액 뿐 아니라 부가세까지 합하면 토지에 부과되는 세는 40여 항목(대동세, 결작, 삼수미 등)

-군정 : 균역법 실시 했지만, 양인 농민의 수가 줄어들고 있던 상황에서 군역 부담이 과중(첩역.백골징포, 황구첨정, 인징, 족징등).

-환곡 : 흉년에 농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만들어짐, 한편으로는 군량미로 활용하여 묵은 곡식을 새 곡식으로 바꾸는 기능도 가졌기에 군현의 창고에 보관된 환곡의 원곡 가운데 절반만을 농민에게 분배하는 것이 원칙

관청이 고리대 형태로 농민을 수탈하는 것으로 당시에 폐단이 가장 심각

 

7)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

-풍수꾼 홍경래(평서대원수)를 비롯,지사 우군칙, 금광과 상업으로 돈을 모은 이희저(역노출신), 빈농 출신 김사용, 김창시등이 중심

-정주성에서 마지막 농성할 때 농민 적극적 참여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면밀한 계획과 장기간의 준비를 거쳐 조직적으로 전개된 무장봉기

-중세사회를 변혁하기보다는 향임, 군교등 부호층에 가해진 수탈을 막는 데 일차적 목적

-박천의 송림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됨

-전투에서 패한 봉기군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집결

-3개월 동안 정주성에서 이루어진 봉기군의 저항은 처절하였다. 계속되는 진압군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이면서 조직적으로 대응

-대치가 계속되면서 진압군측에서는 정주성의 함락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 1812(순조 12) 3월부터는 성 자체를 폭파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전사하고, 대부분의 지도부가 검거되었으며, 2,938명의 봉기군이 체포

 

8) 1862년 농민항쟁의 원인과 경과

-3월에 접어들면서 다른 지역으로 번짐,

-5월까지 경상, 전라, 충청도 일대로 번짐

-농민들은 고을 수령을 쫓아내고 가장 악질적인 아전(향리)을 공격

-조정에서는 회유와 탄압이라는 양면정책, 고을 수령을 파면, 봉기가 전국으로 번져 나가자, 이들에 대한 탄압 강화

-삼정이정청설치 삼정문란을 교구 위한 설정 절목

조세제도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둠, 가장 문제가 많은 환곡을 토지세로 바꾼다는 미봉책을 발표, 이마저도 지배층의 반대로 결국 취소, 농민항쟁은 다시 불거져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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