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FMZJY7PKRR 고려의 건국과 지배층: 귀족사회, 무신정권과 권문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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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과 지배층: 귀족사회, 무신정권과 권문세족

muto1149 2025. 5. 12.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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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 통일과 고려 왕조

*고려시대를 보는 시각

-고려 왕조는 후 삼국의 혼란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시대에는 중앙정부에 권력이 모여있고, 봉건지주, 농민이 있었다.

-고려사회의 지배층은 계속 변경되어 왔다.

-다원사회로 이루어졌다. 골품제로 운영된 신라, 성리학으로 운영된 고려와 다른 나라였다.

 

*신라의 몰락

-최치원과 같은 6두품 인재들을 등용하지 않고 진골들만의 세상을 구축함

-그 사이에 견훤과 궁예가 점점 호족세력들을 부합하기 시작함

-결국 견훤에 의하여 경애왕이 죽게 됨

1)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지 않았음에도 왕건이 왜곡 피력했을 가능성

2)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서도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했을 개연성

3) 견훤의 말대로3자에 의해 경애왕이 죽었으며 견훤과 왕건이 주범을 알지 못했거나 거꾸로 알았음에도 정치적 이유로 침묵했을 개연성

 

경순왕 대에 멸망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있으니 충신의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습하여 스스로 공고히 하고 힘을 다한 이후에 그만 둘 일이지, 천년 사직을 하루아침에 경솔하게 남에게 주겠습니까 - 중략 - 이에 태자는 통곡을 하고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 마의와 초식으로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본기제12, 경순왕편

 

*후백제

-892년 무진주(광주) 습격, 900년에 완산주(전북 전주)를 수도로 정하고 국가체제를 갖춤(동고산성)

-927년 경주 공격, 왕의 집안 동생 김부를 옹립(경순왕)

 

*후고구려

건녕원년(894) 명주(강릉)에 들어갔다. 무리 3,500인을 거느렸는데 (중략) 사졸들 과 더불어 즐거움과 괴로움, 수고로움과 평안함을 함께 하였으며, 상벌(予奪)에 이 르러서는공적으로 하고 사사로이 하지 않았다. 이로써 무리들이 마음으로 두려 워하고 사랑하여 추대하여 장군으로 삼았다.

(삼국사기50, 궁예전).

-양길의 휘하에서 성장, 군사를 거느리고 강원도 여러 지역을 점령, 독자 세력

-송악(개성)의 호족 왕건 부자의 항복을 받아냄

-901년 건국, 905년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마진으로 했다가 다시 태봉으로

-왕건이 나주로 가면서, 후백제의 배후 노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최근 연구에 의하면 궁예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갔다고 함(선각대사비) 왕건은 나주 오다련의 딸과 결혼하여 세력을 확보

-궁예 미륵 관심법으로 부인과 아들을 죽이고 부하 숙청->부하 반란

 

정명 원년(915)에 부인 강씨가 왕이 법에 어긋난 일非法을 많이 행하므로 안색을 바르게 하고 그를 간()하였다. 왕이 그를 미워하여네가 다른 사람 과 간통하였으니 어찌된 일이냐라고하니 강씨가어찌 그러한 일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왕이내가신통력으로 보았다라고하고는 뜨거운 불로 쇠 방망이를 달궈 그 음부를 찔러 죽이고 그 두 아들까지 죽였다. 그 후로는 의 심이 많고 화를 잘 내니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로부터 밑으로는 평민에 이 르기까지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자들이 자주 있었으며, 부양(평강)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이기지 못하였다(삼국사기50, 궁예전).

 

*궁예의 축출과 왕건의 즉위

 

-공산성전투 : 왕건은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경애왕의 죽음을 조문한 후 자신이 기병 5천을 이끌고 내려왔다. 고려 기병의 지휘관은 대장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었고, 927년 대구 공산전투에 대장이 되어 군사5천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신숭겸은 왕건을 대신해 전사

-삼년성전투: 후백제가 차지한 삼년산성을928년에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후백제는 이를 쫓았으나 유금필이 격퇴.

-고창 전투: 주변 호족들이 가세하여 견훤을 무찌름.

 

왕건 일파가 거사를 일으키자 궁예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북문으로 도망하였다가 부양(斧壤)의 백성에게 살해되었다(삼국사기50, 열전 궁예전. 고려사1, 태조 즉위전기)

 

왕공께서 이미 의로운 깃발을 들어 올리셨다!”라고 외치게 하였다. 바삐 달려 다 다르는 백성들이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며 떠 들썩하게 기다리는 자들 또한 10,000여 명이었다. 궁예가 이 소식을 듣고는 어찌 할 바를 몰라 微服차림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바위 골짜기로 도망쳤는데, 얼마후에 斧壤의 백성들에 의해 살해되었다."(삼국사기권제50, 열전 제10, 궁예

 

-935년 후백제의 왕위 다툼으로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도망친 견휜은 왕건에게 귀부 일리천전투를 통해 백제군섬멸

-신라 경순왕도 귀족들과 상의하여 고려에 항복

-후백제를 공격하여 936년 통일

 

견훤이 금산사에 있은 지 3개월만인 6월에 막내 아들 능예(能乂), 딸 애복(哀福), 총애하는 첩 고비(姑比) 등과 더불어 금성으로 도주하여 사람을 보내 태조에게 만나기를 청하였다(삼국사기 권 50 열전 제10 견훤)

 

고려 건국과 후삼국 통일의 의의

-후삼국의 통일로 한민족이 완전하게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통합을 이루게 됨

-통일 신라 말부터 성장한 지방 세력이 고려 왕조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

-고려 건국의 주역은 왕건을 포함한 지방 세력

-고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여 개방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 문화의 토대를 마련-신라의 삼국 통일이 민족 통일의 출발점

 

고려의 후삼국 통일은 실질적인 민족통일의 완성

 

*태조(왕건):

-혼인정책, 사심관제도(공신 출신 지역 사심으로 삼아 지방 통제), 기인제도(지방 세력가 자제를 개경에 거주시켜 이를 견제), 훈요십조(訓要十條) 통치의 기본 방향 제시

-왕건의 부인 기록상 29, 34명의 자녀

-신혜왕후 유씨: 왕건에게 국왕이 되기를 권유

-장화왕후 오씨: 나주 출신(혜종의어머니)-박술희 도움

-각 지방의 세력가와 결혼 -> 혜종(왕규가충주세력 중심으로 암살시도)-정종(4년만에 사망) 전부 이른 시기 사망(정종은 광군 조직)

-결과적으로 왕위 계승 쟁탈전, 결국 정종의 동생 광종이 왕위에 등극

-조세와 부역의 부담 약화 민생 안정, 관료들에게 역분전(役分田) 지급

(새 왕조를 세우는 데 힘쓴 공신들에게 공로에 따라 일정한 토지를 나누어 줌)

-정계(政誡)와 계백료서(誡百僚書)를 지어 관리들이 지켜야 할 규범 제시

 

*훈요10

1.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할 것

2.도선의 풍수 사상에 따라 사찰을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말 것

3.왕위는 적장자에게 물려준다

4.우리나라와 중국은 지역과 사람의 인성이 다르므로 중국 문화를 반드시 따를 필요가 없으며,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이므로 그들의 의관 제도는 따르지 말 것

5.평양(서경)을 중요시하여 1년에 100일은 머물도록 할 것

6.연등회와 팔관회를 성실하게 열 것

7.왕이 된 자는 바른 말을 받아들이고 남을 헐뜯는 말을 멀리할 것

8.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밖의 지세가 나쁘고 인심도 그러하다.

9.관리들의 녹봉을 함부로 가감하지 말고, 농민들의 부담을 가볍게 할 것

10. 왕은 근심이 없을 때에는 경계하고, 옛 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할 것

 

*근친혼

*혜종(태조의 장남, 일찍 세상을 뜸)

*정종(태조의 아들, 왕식렴의 후원으로 왕위에 오름)

(광군의 조직, 서경천도 계획 실패)

-광종은 태조의 딸(이복 동생)과 혜종의딸(조카)을 왕비로 맞이함

-경종은 경순왕의 딸을 맞은 후 근친혼 거듭(외사촌과 결혼)

-성종: 경종의 비인 헌애왕후 와헌정왕후가 모두 대종의 딸, 성종도 경종의 둘째 아들

-성종은 딸만 둘 남기고 38세 나이에 죽고, 18세 나이의 목종에게 왕위 계승

-현종은 경종의 왕비인 헌정왕후가 과부로 있다가 숙부뻘에 해당하는 안종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

-충주 유씨와 황주황보씨를 중심으로 왕실이 재편됨

-근친혼으로 인하여 고려왕실의 출산율이 매우 낮았음

 

 

*광종(태조의 아들)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원래 노비가 아니었는데 전쟁에서 포로로 잡혔거나, 빚을 갚지 못해 강제로 노비가 된 자를 파악하여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함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기반 확대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科擧制) 시행

-신구 세력 교체 도모, 공신과 호족 세력 제거)

-광덕(光德), 준풍(峻豊)의 독자 연호를 사용

-과거제도: 제술과, 명경과, 잡과(기술관)로 나뉨

-제술과:문학적 재능과 정책 등을 시험

명경업: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 능력 시험

계수관시-국자감시-예부시-복시 및 친시(제술업중심의 예부시중심 실시=운영)

-잡과: 법률, 회계, 지리 등 실용 기술학 시험

-법제적으로 양인 이상은 과거에 응시 실제적으로는 주로 귀족과 향리의 자제 응시 백정 농민은 주로 잡과 응시 승려를 뽑는 승과도 시행, 무과는 시행 과거제는 국정 운영을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축(233명 미만, 문종대 532명 정원)

 

*성종

-신라 6두품출신 유학자들이 국정 주도 유교 정치 이념을 실현하고자 함

-최승로(崔承老) ‘시무28를 건의

-유교 이념을 기본으로 불교와 전통 신앙을 아우르며 이루어짐

-지방관 파견, 향리 제도 마련,지방세력 견제

-국자감 정비, 지방경학·의학박사 파견유학 교육 진흥, 과거제도 정비

-중앙 정치 조직 및 지방 행정 조직 정비(도병마사: 국방, 식목도감: 제도와 법, 중서문하성, 상서성, 중추원(재신과 추밀, 승선), 어사대(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고 관리의 비리를 탄핵하며 감찰), 삼사(화폐와 곡식의 출납에 대한 회계 담당)

-경기 : 수도인 개경과 주변의 군, 현을 묶음

-3: 수도인 개경, 고구려의 평양을 서경, 신라의 경주를 동경이라 함

-5: 양계 이남 지역, 그 중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한 지역에 목()을 설치, 그 아래 군, 현 상설 행정기관이 없는 일반 행정단위, 안찰사파견(지방 순찰, 지방관 감독)

-양계: 특수 군사지역

-지방 행정은 지방관이 파견된 주군(州郡), 주현(州縣)에서 행해지고,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屬郡), 속현(屬縣)이 많음

-속현은 주현의 행정 지배를 받음 실제 행정은 향리(鄕吏)담당

-군사조직은 5도 지역 주현군, 양계지역 주진군, 태조 대 2(응양군, 용호군) 6(수도 경비, 전투, 국경 방어를 담당하는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 각각 상장군, 대장군, 장군 등 장교와 일반군인으로 나누어 편성

-주현군은 병종에 따라 보승군, 정용군(전투 부대, 교대로 번상), 일품군(노동부대), 이품군, 삼품군(중앙 통제를 받지 않는 지방사회 노동에 동원)

-주진군은 초군,좌군,우군,보창,신기,보반 등 부대로 나뉨

-특수 행정 구역, , , 부곡(국가 물품 생산)주현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통제 받음

-()과 역() : 수륙 요충지, 교통행정기관-11세기 현종이 거란 침입을 피해 지방에 갔을때향리가 몰라보고 습격하기도 함

 

*현종, 문종(성종대 정비된 고려의 통치체제 보완, 개편)

*목종(천추태후가 김치양과 권력을 휘두르면서 국정 운영에 어려움, 강조의 정변)

*숙종: 외척과 처족을 배제, 지지세력 구성 국정 주도권 장악. 의천을 건의로 금속화폐 유통정책(주존도감, 해동통보, 삼한통보 동전과 활구라고 불린 은병 주조 및 발행, 기병의 중요성을 강조한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 설치)

*예종: 여진 정벌(동북 9성 확보), 2년만에 돌려줌 양현고(장학재단), 국학 7재로 나눔. 궁중 안 문한기구 청연각과 보문각, 의료 구휼기관인 구제도감과 혜민국 설치

*인종: 어린 나이에 즉위, 외조부 이자겸 국정 주도. 척준경을 이자겸 군사적 세력으로 확보

*의종: 국왕 친위대육성, 내시 환관 측근 세력 vs 대간 1170년 부현원 무신정변 발생

*충렬왕~공민왕: 몽골 황실의 부마(몽골()이 왕위 계승에 관여) 충숙왕, 충혜왕 부자 사이 즉위, 퇴위, 복위 거듭함

*공양왕: 권문세족 결집해 왕실 권위 회복 시도.

 

2. 문벌귀족

*과거시험

-과거 시험관 지공거[좌주(座主)]와 급제자[문생(門生)]는 관직 진출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학벌을 형성

-음서(蔭敍): 공신과 종실의 자손, 5품 이상의 고위 관료의 자손 등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료가 될 수 있는 혜택을 받아 관료를 세습함

-최충 문헌공도 등 사학 12도의 학벌이라 할 만한 파벌이 생김(과거 준비)

 

*이자겸(李資謙)의 권력 확보

-성종 이후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

-중앙에서 새로운 지배층(문벌귀족)이 형성됨, 주로 지방 호족 출신 또는 신라 6두품계열-과거와 음서를 통해 관직을 독점하고,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재상이 됨

-경원 이씨 4대에 6명 음직, 음서 출신 모두 11

-정국을 주도관직에 따라 과전을 받고, 공음전혜택

-비슷한 부류끼리 혼인을 맺어 권력을 장악,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어 외척을 맺음

 

- 이자겸의 몰락

최사전은얼마 지나서 군기소감(軍器少監)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이자겸(李資謙)이 이미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매우 휘둘렀다. 왕이 몰래 최사전(崔思全)과 더불어 의논하니 최사전이말하기를, “이자겸이 발호(跋扈)한 것은 오직 척준경(拓俊京)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척준경을 얻는다면 병권(兵權)이 폐하께 속하여 이자겸은 단지 한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척준경은 국공(國公, 이자겸)의 심복이 되었고 심지어 혼인을 맺었으며 아우 척준신(拓俊臣)과 아들 척순(拓純)이 모두 관병(官兵)에게 해를 입었는데 그리할지 의심스럽다.”라 하고 이에 점을 쳐서 길조(吉兆)를 얻었다. 이로 인하여 최사전이 척준경의집에 가서 충의로써 회유하여 말하기를, “태조(太祖)와 열성(列聖)의 신령(神靈)이 하늘에 있으니 화복(禍福)이 가히 두렵습니다. 이자겸은 특히 궁 안의 세력에 의지할 뿐이고 신의가 없으니 좋거나 나쁜 일을 함께할 수 없습니다. 공은 마땅히 한 마음으로 나라를 받들어 영원히 전할 불후의 공적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척준경이 마음속으로 그렇다고 여기고서 마침내 계책을 정하여 이자겸을 제거하였다(고려사 열전 권제11 제신(최사전))

 

3. 무신

 

*무신들의 난

-의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시책을 폈지만, 국왕과 문신들 간의 정치적 갈등

-문신 세력들의 견제로 자신의 뜻을 피지 못함, 말년에는 측근들에 의지해 왕권 유지

-정치에 뜻을 잃고 놀이와 연회를 위해 백성들을 공사에 동원하여 별궁과정자

-1170, 무신들이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쫓아내고 명종을 왕으로 세움

김보당 등 일부 문신 세력이 의종 복위를 시도, 실패하여 의종과 많은 문신들이 살해됨

 

정축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하는 길에 오문(五門) 앞에 이르러 시신(侍臣)을 불러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자 좌우 신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훌륭하구나! 이 땅에서는 병법을 익힐 만하도다.”라고 하였다.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戱)를 하게 하였다. 저물 무렵 어가(御駕)가 보현원 근처에 이르렀을 때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이 앞질러 가서 왕의 명령을 위조하여 순검군(巡檢軍)을 모았다. 왕이 원문(院門)에 막 들어가고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려는데 이고 등이 임종식(林宗植이복기(李復基한뢰(韓賴)를 죽였으며, 왕을 모시던 문관 및 대소 신료(臣僚환관[宦寺]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또 개경에 있던 문신 50여명도 살해되었다. 정중부(鄭仲夫) 등이 왕을 모시고 궁으로 돌아왔다.

고려사 권 19 의종 24

 

*권력 전개 과정

-무신들은 중방을중심으로 권력을 행사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고 토지와 노비를 늘림 저마다 사병을 길러 권력 쟁탈전

-무신들은 법과 관례를 무시, 민을 수탈하여, 지방 사회가 흔들리고 무신들의 권력 다툼과 내분이 일어남

-2쿠테타 일으키려는 이고를 이의방(장교 출신)이 제거, 딸을 태자와 결혼 시킴

-정중부(대장군): 이의방을 제거, 아들을 공주와 결혼 추진 -> 경대승에 의해 제거

-경대승이 병에 걸려 죽자 경주 출신 건달, 의종을 죽인 이의민 권력 확보

-그러나 그 역시 두 아들들이 횡포를 부려 최충헌 동생에 의해 살해 당함

 

*최충헌(崔忠獻)과 최우(崔瑀)의 집권(군사력 인사권을 장악)

-최충헌은 봉사 10라는 개혁방안을 올림, 농민 항쟁의 진압 적극적

-1인 독재체제 구축, 사병집단인 도방을 강화, 자신의 집에 교정도감을 설치(인사, 행정) 최고 집권자는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교정도감이 각종 정책을 집행

-아들 최우: 삼별초 호위부대, 교정도감을 통해 정치 권력 행사

-정방(政房): 인사, 행정을 처리

-서방(書房): 학자, 문신을 모아 정치에 활용

-문학적인 소양과 행정 실무 능력을 갖춘 문신들로 고문 역할

-노비 출신 김준이 몽골과 화평을 유지하자는 문신의 주장을 받아들여 최의 제거.

-임연은 원종을 폐위하고 몽골에 항전하려고 했으나 실패, 이후 사망. 아들 임유무도 개경 환도 세력에 의해 살해당함(무신정권 마무리)

 

*무신정권기 봉기

-서경: 조위총-무신정권에 대한 저항운동 서북 지방 일대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봉기 수년 동안 지속되다가 진압됨

-공주 명학소: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림

망이,망소이형제를 중심으로 봉기-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 개경까지 진격하려 함

-경상도의 운문(청도)와 초전(울산): 신라 부흥세력, 김사미와 효심이 연합 세력 형성

경주와 강릉: 신라의 부흥을 내세움,

서경과 담양: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 외침

-최충헌 정권 초기: 경주의 신라부흥운동(新羅復興運動)’, 1217(고종 4) 최광수(崔光秀)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과 더불어 무신정권의 가혹한 불법행위에 맞서 새로운 질서구축을 기치로 삼았다.

-몽고가 고려의 전 국토를 유린했던 고종 24(1237): 이연년(李延年)등이 원율(原栗:담양)을 중심으로 백제부흥운동을 일으키는 등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한 농민들의 저항

 

4. 권문세족

*권문세가와 농장

-권문세가 : 고려 후기에 새로이 등장한 세력: 원과 자주 교류하게 되면서 몽골어 통역관, 왕과 왕비의 측근, 환관, 응방(鷹坊) 관리 등 원과 관련된 일로 고위 관직에 오른 사람들

-정변과 전쟁을 겪으면서 오랜 기간 관직을 차지하고 권력을 유지한 사람들, 무신집권기에 발탁된 관료 가운데 권세가 대열에 오른 사람들, 왕실 및 귀족 가문들과 혼인, 원과 결탁-경제적 기반

-토지,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토지 소유를 늘림 대규모 토지는 농장으로 경영, 농민들을 농장에 소속시켜 노비처럼 지배농장은 산과 강을 경계로 하였고, 하나의 군이나 현을 모두 차지한 경우도 있음국가에 조세를 내지 않음, 권문세가들이 농장을 확대하는 만큼 국가 재정은 어려워짐

 

*공민왕의 개혁

-1363년 승려 신돈(辛旽)을 기용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

-권문세가들이 불법으로 침탈한 토지를 회복, 농장으로 들어갔던 양인의 신분을 회복-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 수입의 기반을 확대

-신돈은 과도한 권력 확대로 권문세가와 대립 1371년 숙청

-공민왕도 측근에게 살해됨(이전에 삼원수사건, 흥왕사의 난 등발생)

개혁은 실패로 돌아감

-우왕을 비롯한 이인임 세력(친원), 명은 우왕을 지지

*새로운 신흥유신의 등장(이색, 권근 vs 조준 정도전(사전 문제) 정몽주vs정도전)

현재는 신진사대부 뿐 아니라 권문세족도 성리학을 수용했고, 출신에 상관없이 성리학자로 현실인식을 공유하고 개혁에 참여하였다는 점이 설득력을 얻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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