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와 세금
*바보온달 설화: 가난한 모습, 황금 소유로 부를 축적,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국가 지배 세력으로 편입, 노비와 같은 천민으로 떨어지는 사실이 많음
서동 설화에도 금이 나옴
고대 무덤에는 금이 출토 되는 무덤(무령왕릉) vs 금동이 출토되는 유적
백제 경질토기(900도 이상 고온), 전문 기술 전달 신라는 대규모 제철 수공업장 운영
*삼국사기 열녀전에 나오는 효녀 지은 매매노비(무용총의 시녀)
*진대법: 평민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것을 막는 정책, 호민층 견제
*삼국시대에는 전쟁포로로 천민이 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통일신라 이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서 주로 매매와 형벌에 의한 노비가 다수 발생함
*골품제: 성골은 왕족이나 최고 귀족, 진골은 최고 신분으로 중요한 관직을 독점, 6두품은 아찬까지만 오를 수 있으므로 주로 학문과 종교 분야에서 활동
갈등 사례: 설계두(진평왕 시기 배를 타고 당으로 감)
*읍락사회의 하호와 호민: 부여읍락의 호민은 하호를 노비처럼 부림, 삼국 초기에는 제가와 같은 지배층이 하호를 수탈
*철제농기구의 발달, 쇠스랑이나 낫 등을 비롯한 효율적인 농기구 발달, 조, 수수 잡곡을 대신해 밀과 보리 같은 작물이 널리 재배되기 시작함(벽화 속의 농사신(고구려 벽화))
*하호를 노예체럼 지배하던 수취제도가 개별 호의 경제적인 정도를 고려하는 호등제로 발전
*수서 고려전: 고구려에서 1인당 베 5필과 곡식 5석을 걷었다.
조(租): 좁쌀, 콩, 보리, 피 쌀 등의 곡물
용(庸): 군역, 2월과 7월에 동원되어 도로 건설, 보수, 공공건물
조(調): 삼베, 비단, 실 등 섬유제품 혹은 지방특산품(소금, 해산물, 광물, 모피, 약재, 과실)
*하호는 공민, 역역에서 징발, 군역 참여, 개별 호구 수에 국가의 직접적 지배
성 쌓기, 수리 시설 축조 등 부역
세금의 꼬리표 하찰(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500점 이상 출토됨, 신라 촌락문서보다 130문서 이상 앞섬)
신라의 지배층은 식읍 및 녹읍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경제적 이권을 보장 받음
내시령(어떤 관직인지 불분명)답, 촌주위답(촌주), 연수유답(촌민), 관모답(지방 관아 운영과 재정)
신라 촌락문서(이면지로 불경 제작, 일본으로 건너감 1933년 일본 토다이지 정창원에서 발견): 695년(효소왕 4) 서원경(청주) 4개 촌 조사(3년 주기로 현, 촌 둘레, 호구 수, 말과 소의 수, 전답 면적, 뽕나무 잣나무 호두나무 수 작성) 전체 가호수 43호 442명(남자 194, 여자 248, 노비 25, 말 61, 소 53, 뽕나무 4249그루)
*농민은 초적이 되어 활동(국가의 공민이자, 귀족들의 전장에 긴박된 예민, 이중의 부담)
2. 사상과 종교
*불교
- 처음에는 주로 천신사상, 마한: 소국마다 천군이 하늘에 대한 제사를 주관했다.
중국에 불교가 전해진 시기는 1세기 후한 때, 4세기 5호 16국 북방민족 수용 후 불상 만들어짐, 우리나라는 고구려(372), 백제 침류왕(384) 불교 전해진 이후 불상이 만들어짐(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6세기 이후의 불상)
왕실에서는 불교를 받아 들이기 시작함(법흥왕 때 이차돈 순교 공인),
진흥왕 아들 불교식 이름(동륜, 금륜)
진평왕은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석가모니 부모 이름으로 바꾸고 성골을 최상위 골품으로 만듬 - 원광: 진평왕 때 세속오계를 지음
- 자장: 선덕여왕 때 불교철학을 공부하고 돌아옴
중관학파(모든 사물은 존재하지 않음) vs 유식학파(사물은 공허하나 인식을 부정할 수 없음)
- 원효: 본래 진골 출신이 아님. 유학을 갈 수 없음. 신라 불교 경전 섭렵, 대승기신론소를 통해 대립 해소, 일심을 상정, 본질 현상을 공과 유에 대응(일심사상, 화쟁사상)
의상: 진골 가문. 당 유학을 이룸. 귀국 후 부석사와 같은 큰 사찰을 짓고, 제자를 길러냄. 화엄일승법계도(210자), 화엄사상 압축. 670년 신라 귀국 후 해동화엄종 개창.
원측: 현장 문하, 인도에서 새로 수입된 유식학 경전 번역 ‘서명학파’(유식학파)의 시조
선종(9세기 전반): 신라 불교계 바람(선종 수입), 헌덕왕 때 821년, 유학생들이 수도인 경주와 멀리 떨어진 지방에 사찰을 짓고 선종을 보급(지방 호족의 후원을 받음)
- 기존의 교종(敎宗)은 경전연구 중시-선종은 참선 수행으로 깨달음
- 선승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산간에 절을 짓고 문도들을 모아 선문(禪門)을 개창
- 선종은 진골귀족에 반발하는 지방 호족의 호응을 얻었으며, 지방에 널리 전파됨
- 선종 사원에는 부도탑과 탑비가 조성되고,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중시됨
고구려 1탑 3금당, 백제 1탑 1금당(미륵사지 3탑 3원) 황룡사 1탑 1금당->1탑 3금당
고구려 팔각형 목탑, 백제는 사각형이다가 목탑을 본뜬 탑으로 바뀜
미륵사지 중원은 목탑, 동원과 서원은 석탑. 신라는 황룡사 사각형 목탑, 분황사는 중국 전탑을 본뜬 석탑
고구려 사찰: 정릉사지, 금강사지(청암리사지), 토성리사지(이상 평양)
상오리사지(대동군), 원오리사지(평원군)
백제 사찰: 정림사지, 군수리사지, 능산리사지, 왕흥사지(이상 부여) 미륵사지(익산)
신라: 황룡사지, 분황사지(경주)
1) 불국사와 석굴암: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석굴암, 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것이 불국사(대성)
2) 익산 미륵사지석탑 : 사리장엄구 “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
3) 분황사 모전석탑: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선덕여왕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 익산 미륵사지와 비슷한 시기 건축됨
4)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 미륵사지와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석탑,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알려짐
5) 발해 영광탑: 무덤탑인지, 절탑인지 확인되지 않음
6)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 다보탑과 함께 대표적 2형 석탑
7) 감은사지 3층석탑: 2중의 기단에 사각형으로 쌓아올린 3층 석탑으로, 동·서 두 탑이 같은 규모와 구조
8) 양양진전사지 삼층석탑: 통일신라기 도의선사 창건 사찰(가지산문) 하층기단에서부터 차례로 새겨진 비천상, 팔부신중, 사방불 조각은 통일신라 조각의 아름다움을 보여줌
*유교
이상적인 현실 사회를 구현할 방도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체제 정비에 유용함
4세기 후반 소수림왕 태학 설립, 백제 유교 경전 해박한 이를 오경박사로 임명해 유학을 가르침, 신라는 독서삼품과를 통해 승진 상한선 규정
고구려 광개토왕릉문, 모두루묘지, 백제 대남 북조 표문, 사택지적비(사륙변려체) 등
임신서기석: 유교 경전을 3년간 열심히 공부할 것을 서약하는 내용이 담김
포항중성리신라비(501), 포항냉수리신라비(503) 분쟁 판정 내용
울진봉평리신라비(524) 현지 발생 사건 수습, 관계자 처벌 재발 방지
*도교
- 불로장생, 사후승선을 표방함
백제금동대항로: 정상에 봉황을 아래에는 용을 장식(불로장생하는 신선이 용과 봉황과 같은 상상의 동물들과 어우러져 살고 있다(신선 세계이자 별천지 이상향)
3. 의식주와 생활
*옷
고대 사람들은 주로 흰 옷을 입음(바지, 저고리, 바지 위에 치마(여성))
고구려: 윗옷은 저고리, 허리 고정, 아래옷은 바지와 치마를 입음, 머리에는 관모, 발에는 신, 추울 때는 그 위에 두루마기
신라: 상류층의 경우 당의 세련된 옷차림
발해: 통일신라에서 유행한 단령,(두루마기), 갖옷, 담비, 표범가죽으로 만든 옷
*식사
콩: 주요 단백질, 장을 만들기도 함
보리: 토기 넣고 물과 함께 죽
콩과 보리는 벼농사가 일반화 되기 전에 주식이었다.
쌀: 청동기 유적 불에 탄 쌀(비중 낮음)
조: 갈돌로 갈거나 절구나 방아로 찧어 가루로 만든 다음 끓이거나 만듬
수소: 디딜방아로 찧음
김치: 소금에 절인 채소를 반찬으로 먹는 습관(백김치)
맥적: 고구려의 대표 음식 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불로 직접 구움
약식: 정월 대보름 역모를 피한 소지왕이 까마귀에게 밥을 준 것에 유래
고기: 안악 3호분 벽화 고깃간에 노루, 돼지, 닭, 꿩
물고기: 옥저 사람들이 고구려 사람들에게 물고기와 소금을 갖다 바침.
*집
- 고구려 고분벽화: 귀족들은 중문을 사이에 두고 바깥채와 안채로 나뉜 저택에서 살았음, 부엌 외에 고깃간, 외양간, 마구간, 방앗간, 수렛간, 곡식창고 등(안악 1호분 고분 벽화)
- 온돌: 고유의 난방시설(발해)
*취미
스포츠: 말타기, 활쏘기, 씨름, 수박, 사냥(먹고 살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농사를 지으면서 놀이의 성격이 강해짐)
길쌈내기: 여성이 두 편으로 나누어 승부를 결정(한 달) 지는 편은 이긴편을 대접함
*결혼
4. 무덤(죽음)
- 고대사회 지배층은 우월한 신분을 과시하고 이승에서 누렸던 안락한 생활을 저승에서도 누리기 위하여 무덤을 만드는데 공을 들임
덕흥리 고분군(자손들이 더욱 부자가 되고 벼슬은 후왕에 이르게 하소서, 언제까지나 쇠고기, 양고기와 술 및 쌀밥과 맛있는 반찬이 끊이지 않게 해주소서)
- 순장: 노비, 신분이 낮은 신하나 귀족들, 가족, 부여의 경우 100명 고령 대가야도 수십 명씨 순장
옥저: 한 목곽에 집단 묘 형식을 취함(공동체적 형식)
- 고구려: 돌무지무덤(적석총) 5세기 -> 돌방무덤(석실묘) -> 장군총(돌무지 무덤) -> 굴식돌방무덤
-백제: 돌무지무덤 -> 벽돌무덤 -> 돌방무덤, 무령왕 시신을 부패하기 위해 얼음 사용
-신라: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 구덩이를 파거나 땅위에 덧널을 설치해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다음 덧널 위에 둘레를 냇돌로 쌓고 다시 흙으로 덮어 봉문을 높게 만듬(무덤 주위에 십이지신상을 돌리는 전통)
발해: 정효공주 무덤과 삼릉둔 2호 무덤(고구려 무덤과 비슷), 입구를 열면 주검을 모셔놓는 무덤, 네 벽면에는 천장과 그림
벽화 그리는 법: 1) 밑그림을 붙임->바늘로 찔러가면서 선을 그림, 색칠
2) 먹으로 테두리 선을 그리고 색칠(발해)
일반 백성들은 무덤조차 만들기 어려움